이 시기의 신전은 예를 들어 바빌론이나 아슈르에 있는 마르 듀크(Marduck) 신전이나 아슈르 신전은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건조된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상업이나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처소로 계획되었습니다. 지그 라트(ziggurat)라고 불리는 피라미드형 탑은 그 당시 가장 권세가 높던 성직자 계급이 도시 수호의 제단을 구축하고 천문관측과 예언을 행하던 장소이며, 동시에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의 역할까지도 겸한 것입니다. 지그 라트는 칼데아의 각 도시에 많이 건설되었으며 우르(Ur), 니프르(Nippur), 텔스(Tells), 와르카(Warka) 등지에 세워진 바 있습니다. 빌스 님로드의 지그 라트는 헨리 로린손(H. Rawlinson; 1810~1895)의 발굴에 의하면 너비 272' 정사각형인 평면에 높이 160'이고, 정상에는 네 보(Nebo) 신을 모신 신전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4층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7층으로 구성되어 각 층은 경사로로 오르게 되어 있고, 또 7색 타일로 표장하여 7개의 천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창세기 4장 6절에 기록된 바벨의 탑의 건설을 방불케 하며, 하늘로 향하는 인간의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경주되어 왔습니다. 바빌론은 B.C.2000년경의 바벨론 제국의 수도이며, 굉장한 규모의 도시가 건설된 것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Herodotus)는 200평방 마일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콜드 웨이(Karl C. Koldway; 1837~1908)의 발굴에 의하면 그 당시 벌써 도시계획이 시행되어 도로는 도시 내를 흐르는 강에 평행하여 짜이고, 이와 직교하는 도로로 구획되어 일정한 가구 형성의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빌론의 두꺼운 성벽에는 100개의 청동문이 달린 성문이 있었고, 250개의 탑이 임립 해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신전은 웅대한 규모로서, 그중 가장 큰 신전은 이 도시의 수호신인 마르듀크신전이며, 여기에서 가까운 거리에 바벨의 탑이라고 추측되는 단형 탑이 서 있습니다. 주택만 하더라도 3,4층에 이르는 높은 건물이었고, 특히 네브가 드 네자르의 궁전에 만들어진 공중정원(hanging garden)은 가장 이름 있는 것으로, 75' 높이에 아아치 구조로 바닥 레벨을 올린 위에 인공정원을 만들었으며, 물은 유프라테스강에서 스크루 펌프로 공급하는 시설까지 되어 있어 그 착상과 기술은 놀랄 만하다고 고증하고 있습니다. 앗시리아 건축의 니네베 시는 구온직(Kouyunjik)이라고도 하며, 바빌론에서 250마일 북쪽에 있는 대도시입니다. 여기는 센나 케리브(Senna-Cherib; B.C.705~681) 등 역대의 왕이 도읍한 곳입니다. 보타(Botta; 1842)와 레이 아드(Layard; 1845)에 의하여 발굴되었고, 영국 박물관에 있는 릴리 이프는 훌륭한 전쟁도의 모습을 그렸을 뿐 아니라 건물 규모까지도 짐작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니네베 북동 10마일에 위치한 콜 사바드의 사르곤 왕의 궁전은 25 에이커를 차지하고 있고, 50' 고대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직사각형의 방이 중정 주위에 배열되어 전부 700여 개나 되며, 각 부분은 그 용도에 따라서 3개로 구분됩니다. 세라 글리오(Seraglio)는 왕의 주거까지도 포함된 정전이며, 여기에는 정청, 남자들의 숙소, 접견실 등이 10개의 코 오트와 60개의 방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렘은 왕의 후궁들과 가족들이 거처합니다. 칸은 시종들의 방이며, 중심 코 오트 주변에 배치됩니다. 유적의 발굴에 의하여 많은 것들이 밝혀졌으며, 그 가운데 9' 높이의 석고 조각이 벽 밑에 붙어 있었고, 지그 라트나 관측소가 궁성 서쪽에 만들어졌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신전 같이 창을 만들지 않고도 충분한 채광을 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었으며, 특별한 기록을 남긴 바는 없지만 수많은 파이프가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이것을 도움이나 벽에 삽입하여 광선이나 공기의 유통을 꾀한 듯합니다. 평면은 좁고 긴 직사각형으로, 아아치 구조로 지붕을 구축하기 편하게 꾸며졌으며, 벽체의 두께는 28' 이상이나 되어 밖의 열을 차단하는 데 부심하고 있습니다. 페르샤는 고원 지방에 속해 있어 메소포타미아 지방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 아래서 시작되었습니다. 석재와 목재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가구식 구조에 의해서 건물이 구축되었고, 열주를 세운 개방적인 신전이 메소포타미아와는 대조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1500'× 1000' 대지에 40' 높은 고지 위에 건설된 궁성으로, 일부 지역은 암석산을 절토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다른 부분은 큰 돌을 모르타르 없이 쌓는 방식으로 축성하여 전 대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서북편에 있는 접근로는 22' 너비의 굉장히 많은 단수이며, 말의 통행이 가능한 낮은 단의 경사로로 이 구릉 성역에 이르게 됩니다. 크세르크세스왕(B.C.485~B.C.465)에 의하여 세워진 프로필레아(Propylea; 정문)는 인두를 가진 황소의 조각을 정면에 배치하고 유약 칠한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한 육중한 문이며, 이 문을 통하여 각국의 대신과 오아자와 수행원이 궁성에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크세르크세스왕의 열주실(hypostyle hall of Xerxes)은 가장 인상적인 건물이고, 다리우스 왕(B.C.521~B.C.485)이 건설한 100 주실 역시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프르타크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소탕되었다 합니다.
건축일반구조학